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밥 딜런/일생 (문단 편집) === 1990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DA62434-24B7-4E8B-B116-7F568D18D9DC.png|width=100%]]}}} || ||<#000> {{{#fff '''거장의 부활.'''}}} || 1990년 초 신작 앨범 리코딩을 하게 되는데 프로듀서는 돈 워즈와 데이비드 워즈, 통칭 워즈라고 형제라고 불리는 프로듀서였다.[* 참고로 혈연관계가 아니다.] 이들은 직접 밥 딜런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싶다고 나섰다고 한다.[* “현재의 밥의 내면에 계속 살아 있는. 과거의 밥으로 통하는 숨결을 꼬집어 내고 싶다.”] 이 세션을 통해 태어난 앨범이 바로 ‘Under the Red Sky’다. 이 앨범은 악곡은 새로우나 일부러 구식의 접근 방식으로 완성시켜본다는 타입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됐다. 워즈 형제는 다니엘 라노아가 프로듀스한 ‘Oh Mercy’의 좋은 성과를 의식하고 있었고 좋은 앨범을 만들려고 했다. 녹음 실무를 담당한 돈 워즈는 밥과 세상 간의 관계성, 록/밥 역사상 밥의 위치를 다시금 정립하는 것에 대해 갖가지 방법을 짜냈다. 활동 30주년을 맞이하려는 밥 딜런에 대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악곡 각각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것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있었다. [[스티비 레이 본]], 데이비드 린들러, 와디 와치텔, [[슬래시(기타리스트)|슬래쉬]], 알 쿠퍼, [[조지 해리슨]], [[엘튼 존]], 데이비드 크로스비 등 화려한 참가 멤버로 주변을 다지고 ‘긍정적으로 과거를 돌이켜본다’는 워즈의 방식은, 과거 작품들도 신곡도 마찬가지로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는 밥 딜런의 입장에서 위화감이 적지 않았다. 밥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의 제작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서로 다른 밴드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에코가 너무 많아 힘들었다.” 심지어 이 앨범 제작과 트래블링 윌버리스 신작 리코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딜런은 이 당시 낮에는 조지 해리슨, 제프 린과 공동 작업을 하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워즈 형제의 지휘하에 가사에 멜로디를 넣어 노래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조지와 제프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는 생활을 했다. 앨범 ‘Under the Red Sky’는 1990년 9월 11일 발매된다. 상당히 공을 들인 앨범이나 상업적인 면에서도 부진했고 평단에 호평을 받았던 ‘Oh Mercy’와는 달리 대부분의 평단에게 혹평 세례를 받는다. 이 당시 1년 가운데 3분의 1 가까운 시간을 투어로 보내게 되며 자연스럽게 아내 캐롤린과의 사이도 식어갔고 1990년 8월 캐롤린은 밥에게 이혼 소송을 했고 1992년 이혼한다. 같은 해 10월 밥 딜런은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의 미육군사관학교에 초청받아 콘서트를 개최한다. 거기서 사관 후보생들에게 ‘Masters of War’을 들려준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쟁이 발발한다. 걸프전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밥 딜런은 1991년 1월 28일부터 2월 17일까지 유럽 순회공연을 했고 2월 20일 귀국 즉시, [[그래미상]]에서 생애공로자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 시상은 [[잭 니콜슨]]이 했고 매리언 앤더슨,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와 공동 수상했다.] 밥은 수상식에 참석하여, 증정식 전 기념 라이브에서 ‘Masters of War’을 격한 연주와 쥐어짜내는 목소리와 함께 공연한다. 이 모습과 노래와 연주는 한참 전쟁 지지에 대한 기운이 고양되던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밥의 이 무대에는 찬반이 엇갈리기도 했다. 밥 딜런은 평생공로상 수상 후 스피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젠가 너를 남기고 사라져갈 이 세계에서는 나쁜 것들이 쉽사리 너를 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어도 너는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금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어주시므로” 밥 딜런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녹음했던 대량의 미발표 음원들이 있었고 그것을 발굴한 ‘The Bootleg Series’가 컬럼비아 레코드를 매수한 [[소니 뮤직]]에 의해 시작한다. 이 부틀렉 시리즈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발매되고 있으며 딜런의 음악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91년 3월 26일 3종 1세트로 첫 번째 부틀렉 시리즈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가 발매된다. 1961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 58곡이 수록됐는데 그중에 미발표곡은 45곡이었다. 이 시리즈는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다. 이 당시 투어의 고정 멤버들과 많은 무대를 소화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밴드 편성에 의한 앨범 리코딩에 흥미를 잃어간다. 매일같이 대면하는 관객들이 최고의 청취자라는 의식이 높아진 상태였다. 투어를 하면서 밥 딜런은 자택에 설치된 스튜디오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전통 음악 작품을 두 편 녹음한다. 이 앨범들은 밥 딜런이 직접 편곡, 프로듀싱했다. 여기서 딜런은 기타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전에는 자작곡 중에 그것을 집어넣거나 차용하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 두 작품에는 가사나 곡 모두 옛날 형태를 답습하고 있고 밥 딜런의 해석도 적다. 첫 번째 작품은 1992년 11월 3일 발표된 ‘Good as I Been to You’, 두 번째 작품은 1993년 10월 26일 발표된 ‘World Gone Wrong’이다. ‘World Gone Wrong’에는 블루스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두 앨범 모두 평단에 평은 주로 호평이었지만 상업적 성과에서는 부진했다. 1992년은 밥 딜런의 레코드 데뷔 30주년이었다. 그것을 축하하는 음악 이벤트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0월 16일 개최된다. 밥 딜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 밥 딜런의 노래를 불렀다. 음악 감독은 과거 딜런 밴드의 기타리스트 G.E.스미스였고 참석한 뮤지션들은 대부분의 반주를 맡는 ‘하우스 밴드’에 부커티 앤 앰지스, 짐 켈트너, 안톤 피그, 케롤린 헤스터, 더 클랜시 브라더스, 토니 메이컴, 로비 오코넬, 리치 해이븐스, [[조니 캐쉬]] & 준 카터 캐쉬, [[윌리 넬슨]], [[스티비 원더]], 존 멜렌켐프, [[루 리드]], 에디 베더, [[시네이드 오코너]], [[닐 영]], [[에릭 클랩튼]], [[더 밴드]], 조니 윈터, 로저 맥귄, [[조지 해리슨]] 등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대거 출연했다. 이 공연은 전 세계로도 생중계됐다. 네 시간에 걸친 콘서트에 밥 딜런은 마지막에 등장해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두 곡[* Song to Woody, It’s Alright Ma’.]을 불렀고 ‘My Back Pages’를 닐 영과 에릭 클립튼 등이 릴레이로 선보였다. TV 방송시간 틀 안에 다 수록할 수 없어서 중계방송에서는 볼 수 없던 앵콜 장면에서는 밥 딜런은 혼자 직접 기타를 치면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를 부르기도 했다. 이벤트는 성황리에 개최됐고 밥 딜런 역시 매우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의 영상을 CD와 VTR로 시판됐다. 1994년 2월 밥 딜런은 일본 방문 투어를 개최했다. 이 해에는 5월 20일 나라 도다이지 경내에서 개최된 ‘The Great Music Experience 94 AONIYOSHI’에도 출연해 도쿄 뉴필하모닉 관현악단과의 공연 형식으로 ‘A Hard Rain's a Gonna Fall’, ‘I Shall Be Released’, ‘Ring Them Bells’를 부른다. 이 콘서트는 전 세계로 위성 생중계된다. 나아가 1994년 8월 14일에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우드스톡 94’에도 출연한다. 딜런의 콘서트와는 전혀 다른 [[그런지]]하고 [[얼터너티브 록]]을 즐기는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반응을 알 수가 없었으나 딜런이 등장하자마자 장내는 환희를 하며 끓어올랐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첬다. 이 해 11월에는 [[MTV 언플러그드]]에 언제나 투어를 함께한 딜런 밴드와 출연한다. 브랜드 오브라이언이 해먼드 [[오르간]]으로 연주를 보조했다. 밥은 오래된 전통적인 포크송을 선보이려 했으나 제작 측으로부터 제지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히트곡 위주의 무대로 변경한다. 이 당시 밥 딜런의 레이블은 곡들을 손보고 이렇게 저렇게 순서를 바꿔가며 특별 음반들을 발매한다. 1994년 11월 15일에는 ‘Bob Dylan's Greatest Hits Volume 3’, 1995년 2월 7일에는 ‘Highway 61 Interactive’[* 그리니치 빌리지를 탐방하고 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관련 데이터를 볼 수 있다.], 1996년 6월 2일에는 ‘The Best of Bob Dylan’이 발매된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의 밥 딜런은 투어 위주의 활동을 하면서 본인의 자작곡을 발표하지 않는다. 1996년에는 ‘의무방어전적인 음반’마저 나오지 않게 된다. 당시 딜런은 본인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소니 뮤직은 밥 딜런과 관계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96년 가을 밥 딜런은 한 뉴욕 호텔 객실에서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에게 새로운 가사를 읽어주고 있었다. 라노아의 자서전 ‘Soul Mising’에 의하면 라노아가 그 가사를 다 읽자, 딜런은 ‘레코드로 만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고, 그 가사는 라노아가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여태껏 일찍이 그 누구도 써본 적이 없는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몇십 년에 걸친 인생 경험과 고백이 적힌 페이지가 내 눈앞에 있었다. 로큰롤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신화가 이 사내의 강철처럼 냉철한, 새파란 눈에 의해 분쇄되었다.” >---- >― 다니엘 라노아 라노아는 이 가사를 읽자마자 딜런의 새 앨범이 걸작이라고 직감했다. 밥의 새로운 가사 안에 들어있는 비트와 멜로디에 대한 이미지의 조각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밥은 그때 리코딩에 참고하라며 로큰롤, 블루스의 추천 레코드 리스트를 라노아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찰리 패튼, 리틀 월터, 아서 알렉산더 등의 작품들이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에 공통되는 사운드 특성은 주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들이 가지는 황량함, 녹음 기자재의 한계점을 음악의 파워가 능가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틀림, 라노아의 자서전에는 과대 입력(오버드라이브)이라고 적고 있는 현상에 의해 생기는 사운드, 바로 이것이 밥 딜런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라노아는 추측했다. 밥의 새로운 앨범의 본격 리코딩 작업은 마이애미의 크라이테리아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드러머 4명, 기타 2명, 페달 스틸 기타 1명, 슬라이드 기타 1명, 키보드 1명, 오르간 겸 아코디언 1명, 퍼커션 1명, 그리고 라노아 자신이 몇 종류나 되는 기타를 가지고 참가한다. 이 인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의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스튜디오 라이브 형식이었다. 사운드의 특색을 담당한 것은 키보드의 제임스 딕킨슨과 오르간의 명수인 오기 메이어스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과 묵직한 중량감 양쪽 모두를 두 명의 건반주자가 자아냈고 포크, 블루스, 로큰롤이 교회음악으로 접착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11일 정도의 녹음 작업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믹스한 후 완성 작업이 진행되었다. 밥은 완성단계에서도 가사나 코드를 추가적으로 변경했다. 앨범의 내용은 실연, 방황, 고독, 좌절, 체념, 죽음을 아름답게 혹은 잔혹하게 표현한다. 도합 11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제목은 ‘[[Time Out of Mind]]’로 붙여졌고 1997년 9월 27일 발매된다.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그야말로 평단에서 오랜만에 '''극찬''' 세례가 쏟아진다. 평단은 거장의 부활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이 앨범을 기점으로 80년대부터 주춤했던 음악 커리어가 완벽하게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상업적인 성과도 영국, 미국 모두 10위를 기록하며 반등한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며 밥 딜런 커리어 최초 본인의 앨범으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게 된다.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을 만들 당시에 대해, 과거의 컨디션을 회복하려던 와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앨범의 성과는 평단의 극찬, 상업적 반등도 있겠지만 앨범을 만들 때마다 항상 고통스러워하던 밥이 마침내 편안해졌다는 점도 있고 녹음의 기본적 방법을 프로듀서에게 의존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앨범이 발매되는 동시에 밥 딜런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볼로냐 시에서 열린 가톨릭 유소년 집회에서 공연했다. 딜런은 부른 후, 그의 베이지색 카우보이 모자를 벗고 교황에게 인사하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갔다. 교황은 밥 딜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지난 1997년 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 청소년 행사에 참석한 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밥 딜런을 잘못된 종류의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베네딕토 교황은 2007년 3월 8일 발표했다. 베네딕트 교황의 책에서, 베네딕트 교황은 왜 그가 밥 딜런을 좋아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그가 그를 잘못된 "예언자"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이 콘서트에서 20세기 대중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선정된 딜런이 교황 앞에서 세 곡을 불렀다.[* "[[Knockin' on Heaven's Door]]", "A Hard Rain's A-Gonna Fall", "Forever Youn".] 1997년 5월 24일, 56세의 생일을 딸 마리아의 가족과 보낸 밥 딜런은 가슴에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낀다. 다음날 진행된 검사 결과 입원이 결정된다. 결과는 히스토플라즈마균 감염에 의한 심낭염이었고 ‘치사율이 발견되는 상태’라고 보도된다. 다행히도 투약만으로 회복했지만 투어들은 불가피하게 취소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레이블 측에서는 발매 스케줄로 밥 딜런을 구속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때 밥 딜런이 한 말이 “하마터면 [[엘비스 프레슬리|엘비스]]를 만날뻔했어요.”였다. 1997년 12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딜런에게 [[백악관]]에서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여했다. 빌 클린턴은 상을 수여하며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보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평화를 어지럽힌 힘 있는 자들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1999년 딜런은 북미 투어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과 함께 시작했고, 6월 1일에 시작하여 9월 18일에 끝났다. 이 콜라보레이션은 호평을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타임지]]는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타임지는 “거장 시인, 신랄한 사회 평론가, 용감무쌍한, 반문화 세대의 정신을 지도한 인물”이라고 밥 딜런을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